
준호는 신고에게 받은 수신기를 손안에서 돌려 보았다. 작은 화면 위의 점은 마을 바깥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고가 말했던 바위 능선과 방향이 같았다. 나무 아래를 벗어나자 발밑까지 닿던 열매의 빛이 금세 옅어졌다.
준호지르렉스가 사는 쪽이야.
신고조심해. 엄청 빠른 녀석이야.
준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자 루비가 먼저 길을 살폈다. 민정과 남정도 펫들을 불러 모아 뒤를 따랐다. 두르간을 찾으러 가려면 먼저 이 마을의 불빛부터 지켜야 했다. 준호는 점이 화면 밖으로 달아나기 전에 걸음을 서둘렀다.
준호: 지르렉스가 사는 쪽이야.
신고: 조심해. 엄청 빠른 녀석이야.

마을의 지붕이 나무 뒤로 사라질 무렵, 능선 너머에서 푸른빛이 솟았다. 구름 밑을 갈라 놓을 만큼 굵은 전기 줄기가 바위 위로 뻗더니 숲 전체를 하얗게 비췄다. 잠깐 늦게 밀려온 굉음에 준호가 어깨를 움츠렸다. 발밑의 작은 돌들이 떨릴 정도였다.
준호저쪽이야! 서둘러!
루비가 몸을 낮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준호도 수신기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손가락을 꼭 쥐었다. 누군가 싸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뒤따르는 발소리 사이로 두 번째 폭음이 울렸고, 일행은 나뭇가지가 팔을 스치는 것도 피하지 못한 채 비탈을 올랐다.
준호: 저쪽이야! 서둘러!

능선 아래의 숲은 군데군데 검게 그을려 있었다. 부러진 가지 사이에 커다란 지르렉스가 웅크리고 있었다. 준호는 그 몸에서 남은 전기가 튀는 것을 보고 잠깐 멈췄지만, 곧 들려온 소리는 포효가 아니었다. 지르렉스는 빈 바위틈을 내려다보며 목이 메도록 울고 있었다.
준호무슨 일이 있었어?
지르렉스내 아들… 지지를 데려갔어!
고개를 든 지르렉스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앞발은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닥을 움켜쥐고 있었다. 준호가 누가 데려갔느냐고 묻자, 지르렉스는 자신이 쫓다가 놓친 숲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호: 무슨 일이 있었어?
지르렉스: 내 아들… 지지를 데려갔어!

지르렉스가 설명하는 동안에도 숨이 거칠게 끊겼다. 아들 곁에 나타난 것은 커다란 검은 늑대였다고 했다. 지르렉스가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지지가 그 입에 물려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늑대의 몸이 검은 연기로 풀렸다는 것이었다.
지르렉스검은 늑대였어. 연기로 사라졌다가 다른 데서 나타났어.
전기를 쏘아도 늑대가 있던 자리에는 연기만 남았다. 다른 쪽에서 지지의 작은 몸이 보이면 다시 그리로 달렸지만, 그때마다 늑대는 더 먼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르렉스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르렉스부탁이야. 지지를 찾는 걸 도와줘.
준호는 수신기를 내려다봤다. 빠르게 옮겨 다니던 점이 숲 안에서 멈춰 있었다. 그가 화면을 보여 주자 지르렉스는 눈물을 닦을 틈도 없이 일어섰다.
지르렉스: 검은 늑대였어. 연기로 사라졌다가 다른 데서 나타났어.

지르렉스는 앞서 달리다가도 준호가 방향을 고쳐 부르면 곧바로 몸을 틀었다. 덩치 큰 몸이 나무 사이를 지날 때마다 가지가 흔들렸다. 능선 반대편의 작은 공터에 가까워지자, 준호의 발걸음과 화면의 점이 겹쳐졌다.
낮은 바위 곁에 지지가 쓰러져 있었다. 지르렉스와 같은 초록빛 몸이었지만, 웅크린 크기는 아버지의 앞발보다도 작아 보였다. 꼬리 끝의 푸른 결정이 풀잎 사이에 걸려 있었다. 준호가 멈추기도 전에 지르렉스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지르렉스지지야! 아빠 왔어!
지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르렉스가 다급히 몸을 낮추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옆구리 쪽에서 검은 바람이 터졌다.
지르렉스: 지지야! 아빠 왔어!

지르렉스의 몸이 옆으로 밀렸다. 발을 고쳐 디디려 하자 이번에는 반대쪽 어깨에 충격이 닿았다. 얼굴과 옆구리에 긁힌 자국이 생겼고, 통증에 눈을 찡그린 지르렉스의 앞다리가 꺾였다. 준호는 공격한 녀석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방금 몸이 나타났던 자리에는 풀어지는 검은 연기만 남아 있었다. 그 연기가 채 걷히기도 전에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검은 형체가 솟아 공격했다.
지르렉스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공격하는 거야!
지르렉스는 아들 쪽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리를 벌리고 버텼다. 전기가 등에서 튀어 올랐으나 검은 흔적은 그보다 빨리 자리를 옮겼다. 일행도 함부로 뛰어들지 못했다. 준호는 지지가 있는 바위 쪽으로 몸을 낮추며, 다음 공격이 어디에서 오는지 귀를 세웠다.
지르렉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공격하는 거야!

공터를 가르던 연기가 한곳으로 모였다. 검은 앞발이 땅을 디디고, 바람에 날리는 갈기 사이로 보랏빛 눈이 드러났다. 단순히 털빛만 어두운 늑대가 아니었다. 드러난 몸집은 지르렉스보다도 컸고, 어깨에서 꼬리까지 겹겹이 솟은 털 주위로 검은 연기가 돌았다. 지르렉스는 상처 난 어깨를 움츠린 채 그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아르칸너는 이유가 있어서 루루를 죽였냐?
준호의 손이 멎었다. 루비도 늑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지르렉스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 이름을 되뇌었다. 검은 늑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를 드러낸 입에서 낮게 새어 나오는 숨마다 분노가 묻어 있었다.
아르칸: 너는 이유가 있어서 루루를 죽였냐?

아르칸은 지르렉스가 지지를 돌아보는 것조차 참기 어렵다는 듯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아르칸루루는 내 하나뿐인 가족이었어.
그는 루루를 잃은 뒤 복수하려고 어둠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누구 뒤에 숨어 떨 필요도, 친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필요도 없는 힘이었다. 지르렉스의 눈이 커졌다. 작은 루루 뒤에 웅크리고 있던 늑대의 눈빛이 검은 갈기 사이로 겹쳐 보인 모양이었다.
지르렉스너… 그때 그 늑구구나.
아르칸이제 난 아르칸이야. 나를 괴롭혔던 놈들,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을 거야.
준호가 한 걸음 다가가려 하자 검은 연기가 길을 가로질렀다. 지르렉스는 물러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오해라고, 그날 자신이 왜 루루를 찾아갔는지부터 들어 달라고 했다.
아르칸: 루루는 내 하나뿐인 가족이었어.
지르렉스: 너… 그때 그 늑구구나.

지르렉스가 꺼낸 이야기는 준호가 늑구에게 들었던 것과 달랐다. 그의 기억 속에는 먼저 아픈 지지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기운이 약한 아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지쳤고, 아버지가 곁을 지켜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지르렉스지지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어.
지르렉스지지 병을 고치려면 생명수가 필요했었지.
생명수라면 아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얼마 뒤 펫샵이 무너졌고, 루루가 그곳의 생명수를 챙겨 나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르렉스는 그 말을 붙잡고 숲을 뒤졌다. 루루를 찾아냈을 때 반가웠던 것도, 그제야 지지를 살릴 길이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르렉스: 지지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어.
지르렉스: 지지 병을 고치려면 생명수가 필요했었지.

지르렉스의 설명 속에서, 그날 루루는 나무뿌리 곁에 서 있었다. 지르렉스는 서둘러 다가가다 작은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아들이 아프다는 말을 꺼내며 생명수를 물었다.
지르렉스생명수, 조금만 나눠 줄 수 있을까?
루루없어! 생명수 없다고!
루루의 목소리는 곧바로 날카로워졌다고 했다. 가방을 내밀거나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지르렉스가 더 다가오지 못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준호는 두 설명을 머릿속에서 맞춰 보려 했다. 늑구는 지르렉스가 먼저 이유 없이 공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지르렉스는 생명수를 묻자 루루가 먼저 자신을 공격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르렉스: 생명수, 조금만 나눠 줄 수 있을까?
루루: 없어! 생명수 없다고!

지르렉스는 자신의 몸에 공격이 닿으면 전기가 저절로 튀어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날도 루루의 공격을 받은 순간 등에 있는 결정들이 빛났고, 몸을 돌려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방전이 시작됐다고 했다.
지르렉스안 돼, 가까이 오지 마!
그가 기억하는 외침은 번쩍이는 전기에 묻혔다. 가까이 있던 루루가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작은 몸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만큼 크게 다쳤다. 지르렉스는 그 순간을 말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지르렉스루루를 죽이려고 찾아간 게 아니었어. 내 아들을 살리고 싶었을 뿐이야.
준호는 곧바로 어느 쪽의 말이 맞는지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지르렉스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칸의 발밑을 돌던 연기가 거칠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지르렉스: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아르칸은 지르렉스의 설명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루가 먼저 공격했다는 말은 돌아오지 않을 친구를 탓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바위 너머에서 이를 드러내자 발밑을 돌던 검은 연기가 거칠게 일어났다.
아르칸거짓말하지 마! 너도 가장 소중한 걸 잃어 봐!
그의 시선이 지르렉스를 지나 작은 지지에게 닿았다. 지지는 아버지 앞쪽의 낮은 바위 곁에 쓰러져 있었고, 아르칸과의 사이에는 넓은 빈 땅이 남아 있었다. 준호는 늑대가 거리를 재듯 몸을 낮추는 것을 보았다. 그 눈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자마자 지지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르칸: 거짓말하지 마! 너도 가장 소중한 걸 잃어 봐!

지르렉스도 아르칸의 시선을 알아챘다. 상처 난 앞발로 땅을 짚고 아들 앞을 막으려 하자 등에 박힌 결정들이 푸르게 빛났다. 그는 정면의 늑대를 향해 전기를 쏘았다.
지르렉스지지한테 오지 마!
전기는 방금까지 아르칸이 서 있던 바위에 꽂혔다. 그러나 그곳에는 흩어지는 검은 연기만 남아 있었다. 거의 동시에 지지 곁에서 또 다른 연기가 솟더니 커다란 턱과 앞발이 드러났다. 넓었던 거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지르렉스가 고개를 돌릴 때, 준호는 지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바로 옆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지르렉스: 지지한테 오지 마!

준호는 지지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부딪쳤다. 작은 머리를 팔 안쪽으로 받치고 등을 둥글게 말아, 벌어진 이빨과 지지 사이에 자기 몸을 밀어 넣었다. 피할 곳을 찾을 시간은 없었다.
준호안 돼! 지지는 건드리지 마!
아르칸의 입이 준호의 어깨 바로 앞에서 멎었다. 검은 연기가 소년의 재킷 끝을 스쳤지만 이빨은 닿지 않았다. 준호는 눈을 감지 않고 품 안의 지지를 더 깊이 감쌌다. 뒤에서 루비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아르칸은 이미 공격을 멈추고 있었다.
준호: 안 돼! 지지는 건드리지 마!

자기 앞을 가로막은 준호의 등을 본 순간, 아르칸의 눈앞에 다른 풍경이 겹쳤다. 어두운 숲 대신 햇빛이 비치던 물가가 떠올랐다. 은 속성 열매를 놓쳤다며 세로가 발굽을 들어 올렸을 때, 아직 작은 늑구였던 자신을 준호가 품에 안아 감쌌다.
준호그만해! 늑구한테 손대지 마!
그날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다시 들렸다. 머리 위로 떨어질 줄 알았던 공격은 끝내 닿지 않았다. 자신 대신 앞을 막아선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칸은 다시 눈앞을 보았다. 지금 지지를 감싼 팔도, 이빨 앞을 막아선 등도 그때와 같았다. 벌어져 있던 턱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준호: 그만해! 늑구한테 손대지 마!

준호를 밀어내기만 하면 지지에게 닿을 수 있었다. 아르칸은 앞발을 들었다가 멈췄다. 자신을 지켜 주던 팔을 물어뜯는 모습을 떠올리자,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한 발 더 나갈 수 없었다.
아르칸준호는 공격할 수 없어. 나를 지켜 줬잖아.
그렇다고 루루의 마지막 모습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칸의 시선이 준호에게서 천천히 벗어나, 아들 쪽으로 다가오려는 지르렉스에게 멎었다. 지르렉스도 고개를 돌려 아르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망설이던 앞발이 땅을 짚었다. 준호를 향해 열렸던 턱은 다물렸지만, 분노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르칸이렇게 된 거, 지르렉스라도 죽이겠어.
아르칸이 몸을 돌리자 준호는 지지를 품 안으로 더 깊이 감쌌다. 그 짧은 망설임이 모두를 살리는 선택으로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늑대의 눈은 이미 지르렉스만 보고 있었다.
아르칸: 준호는 공격할 수 없어. 나를 지켜 줬잖아.
아르칸: 이렇게 된 거, 지르렉스라도 죽이겠어.

지르렉스는 자신에게 돌아선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물러서면 준호와 지지가 있는 쪽으로 싸움이 밀려갈 터였다. 그는 둘과 거리를 벌리는 쪽으로 몸을 틀며 꼬리 끝의 결정을 세웠다. 푸른 전기가 결정 안으로 빠르게 모였다.
지르렉스꼬리 결정탄!
꼬리를 휘두르자 날카로운 결정탄이 연달아 쏟아졌다. 아르칸의 가슴을 향하던 탄환들은 검은 연기를 뚫고 뒤편 바위에 박혔다. 지르렉스가 곧바로 시선을 올리니 늑대는 더 높은 바위 위에 서 있었다. 발끝에서 막 흩어진 연기가, 그가 달려서 피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지르렉스: 꼬리 결정탄!

결정탄을 피한 아르칸은 바위 위에서 앞발을 옆으로 그었다. 발톱 끝에 모인 검은 바람이 가늘어지더니, 휘어진 칼날처럼 지르렉스에게 날아들었다.
아르칸흑풍 참격!
지르렉스는 급히 앞다리를 들어 가슴을 가렸다. 참격이 비늘과 맞부딪치며 발밑의 흙까지 길게 파냈다. 상처 위로 충격이 겹치자 몸이 옆으로 밀렸다. 그가 다시 중심을 잡기도 전에 아르칸의 윤곽이 연기로 풀리고 있었다.
아르칸: 흑풍 참격!

옆으로 밀린 지르렉스는 뒷발에 힘을 주어 버텼다. 아르칸이 다시 사라지기 전에 바위까지 한꺼번에 베어 버릴 생각으로 긴 꼬리를 크게 돌렸다. 꼬리 끝의 전기가 얇고 넓은 칼날로 펴졌다.
지르렉스전광 꼬리!
푸른 초승달이 늑대가 서 있던 자리를 가로질렀다. 바위가 갈라지는 동안 아르칸은 이미 그 위쪽의 다른 발판으로 옮겨 가 있었다. 지르렉스는 시선을 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어디에 나타나든 먼저 맞받아칠 작정이었다.
지르렉스: 전광 꼬리!

꼬리의 전기가 바위를 가른 뒤에도 지르렉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위쪽 발판에 있던 아르칸이 연기로 흩어진 순간, 새로운 연기는 지르렉스의 바로 정면에서 솟았다. 앞발 하나를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아르칸그림자 도약!
거리를 좁힐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검은 연기 사이에서 나타난 앞발이 곧바로 어깨를 한 번 할퀴었다. 지르렉스가 고통에 몸을 움츠리며 반격하자 발톱을 거둔 늑대는 다시 사라졌다. 전기는 비어 버린 연기 사이만 갈랐다.
아르칸: 그림자 도약!

어깨를 할퀴인 지르렉스는 신음하면서도 땅을 놓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 쏘는 공격만으로는 늑대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는 숨을 짧게 들이쉬며 등에 박힌 결정 네 개를 공중으로 띄웠다.
지르렉스등비늘 칼날!
네 칼날이 부채처럼 벌어졌다. 지르렉스는 조금 떨어져 모습을 드러낸 아르칸을 노리고, 서로 다른 각도에서 한곳으로 파고들게 했다. 늑대가 몸을 낮추자 네 줄기의 푸른빛이 퇴로를 좁히며 날아갔다.
지르렉스: 등비늘 칼날!

결정들이 한곳에서 맞부딪쳤다. 푸른 섬광과 함께 바위가 부서졌지만, 그 가운데서 찢겨 나온 것은 털이 아니라 연기였다. 지르렉스는 칼날을 거두기도 전에 고개부터 돌렸다.
폭발 지점 옆의 빈 땅에서 검은 연기가 새로 뭉쳤다. 아르칸은 네 칼날 사이를 달려 나온 것이 아니었다. 포위된 자리 자체를 떠나 버린 뒤였다. 지르렉스가 다시 조준하려는 순간, 늑대가 낮게 몸을 웅크렸다.

새로 나타난 아르칸의 양옆으로 바람이 갈라졌다. 검은 흐름의 끝이 길고 뾰족한 송곳니 모양으로 굳어지더니 지르렉스를 향해 벌어졌다.
아르칸공허의 송곳니!
지르렉스가 피할 쪽을 찾기도 전에 두 갈래의 송곳니가 양옆에서 맞물렸다. 비늘을 조여 오는 압력에 숨이 막혔다. 그는 다리를 벌려 버티며 전기를 뻗었지만, 아르칸은 그 빛이 닿기 전에 몸을 연기로 흩뜨렸다. 송곳니가 풀린 뒤에도 지르렉스의 발은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르칸: 공허의 송곳니!

송곳니 모양의 바람이 풀리자 지르렉스는 억눌렸던 숨을 토했다. 아픈 다리를 억지로 펴고 앞쪽에 결정 세 개를 일렬로 세웠다. 흩어 쏘면 피하더라도, 길 전체를 태울 만큼 굵은 전류라면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르렉스도체 집속포!
결정 사이로 모인 전기가 굵은 빛줄기로 뻗었다. 땅의 먼지가 양옆으로 밀려나고, 포격은 아르칸이 올라선 바위까지 곧게 이어졌다. 늑대의 몸 가장자리가 흔들렸지만 지르렉스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지르렉스: 도체 집속포!

집속포가 바위를 꿰뚫었다. 돌 표면이 푸르게 달아오르며 갈라졌고, 늑대가 서 있던 곳에 남은 연기도 빛 속에서 흩어졌다. 지르렉스는 전류를 낮추려 했지만, 아르칸은 이미 빛줄기 옆의 낮은 자리에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검은 늑대는 몸을 웅크린 채 포격 아래를 바라보았다. 전기가 멎자 공터에 잠깐 빈틈이 생겼다. 지르렉스가 다음 결정을 불러오려는 사이, 그 발밑의 마른 잎들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은 원은 곧 발밑의 흙까지 끌어당겼다. 처음에는 먼지와 마른 잎만 움직였지만, 검은 구름이 땅에서 피어올라 지르렉스의 발목을 감았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던 바람들이 하나로 엉켜 들었다.
아르칸밤의 폭풍!
아르칸은 떨어진 자리에서 몸을 낮춘 채 바람을 끌어올렸다. 작은 소용돌이들은 지르렉스의 무릎과 가슴 높이까지 천천히 자랐다. 지르렉스는 아들이 있는 쪽으로 발을 옮기려 했지만, 땅에 박힌 발톱 주위에서 돌과 나뭇가지가 먼저 떠올랐다.
아르칸: 밤의 폭풍!

폭풍은 나무보다 높아졌다. 짙은 구름이 겹겹이 솟아 올라 하늘을 덮고, 그 안에서 일어난 보랏빛 섬광이 지르렉스의 윤곽을 잠깐씩 비췄다. 그는 처음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좁혀 드는 바람에 몸을 낮췄다.
등에서 솟은 전기는 구름을 갈랐지만 바깥의 아르칸에게 닿지 못했다. 바람이 한꺼번에 조여 들었다가 터지자 바위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았다. 지르렉스는 앞발로 땅을 짚고 간신히 넘어지지 않았다. 구름이 흩어지는 틈으로 검은 늑대의 눈이 다시 보였다.

폭풍 속에서 마구 전기를 쏘아도 아르칸에게는 닿지 않았다. 지르렉스는 흐트러진 숨을 삼키며 다음 모습을 기다렸다. 늑대는 사라졌다가 나타날 때마다 아주 잠깐, 네 발로 땅을 짚었다. 노릴 수 있는 때는 그 순간뿐이었다.
등의 결정들이 한꺼번에 빛났다. 전기를 밖으로 흩뿌리는 대신 얼굴 앞의 한 점에 압축하자, 길고 거대한 창 모양의 빛이 만들어졌다. 세 결정이 그 밑을 받치며 흔들림을 붙잡았다.
지르렉스지르렉스의 플라스마!
구름 너머 바위에 검은 앞발이 닿았다. 지르렉스는 늑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를 향해 빛의 창을 쏘았다.
지르렉스: 지르렉스의 플라스마!

이번에는 연기가 먼저 흩어지지 않았다. 푸른 창이 막 모습을 갖춘 아르칸의 어깨를 정확히 때렸다. 검은 털 위로 전기가 번지고, 늑대의 커다란 몸이 뒤로 젖혀졌다.
아르칸크윽!
지르렉스는 이를 악문 채 빛을 밀어붙였다. 아르칸의 발이 바위에서 미끄러지고 어깨의 털 끝이 조금 그을렸다. 더는 빈 곳을 맞힌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류를 붙들던 결정들의 빛도 빠르게 약해졌다. 포격이 끊긴 뒤, 흩어지던 연기가 다시 늑대 쪽으로 모여들었다.
아르칸: 크윽!

아르칸은 고개를 낮춘 채 어깨에 남은 푸른 불꽃을 털어 냈다. 아픈 곳을 돌아보던 눈이 지르렉스에게 박혔다.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던 공격에 맞았다는 사실이 통증보다 더 거슬렸다.
아르칸누군가에게 공격 당하는 시절은 끝났다.
발밑의 연기가 두껍게 말려 올라왔다. 바닥의 작은 돌들이 떠오르고, 늑대의 갈기가 거친 바람에 곤두섰다. 지르렉스도 다시 전기를 모았다. 하지만 한 번 틈을 찾아냈다는 안도감은, 더 짙어진 검은 기운 앞에서 금세 사라졌다.
아르칸이걸로 끝내 주마!
아르칸: 누군가에게 공격 당하는 시절은 끝났다.
아르칸: 이걸로 끝내 주마!

지르렉스는 남은 힘을 모아 눈앞의 아르칸을 노렸다. 방금처럼 모습을 갖추는 순간을 잡으면 다시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르칸은 이번에는 더 짙은 연기를 끌어올렸다. 바위 위에 선 몸이 발끝부터 검은 연기로 무너져 내렸다.
아르칸암천의 칠연섬!
목소리가 끝났을 때는 얼굴마저 사라져 있었다. 지르렉스는 낮게 자세를 잡았다. 공터의 바람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당겨졌고, 다음 순간 한쪽 어깨 바로 앞에서 연기가 거꾸로 뭉치기 시작했다.
아르칸: 암천의 칠연섬!

첫 번째 공격은 이빨이었다. 아르칸이 어깨 앞에 나타나는 것과 턱을 닫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지르렉스는 옆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큰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
등의 결정에서 전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자신을 물었던 턱은 이미 풀어지는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지르렉스가 그 자리를 돌아볼 때, 반대편 땅에서 새 검은 연기가 솟았다.

두 번째는 반대쪽에서 뻗어 온 발톱이었다. 지르렉스는 전기를 쏜 방향과 정반대로 몸을 돌려야 했다. 몸이 따라가기 전에 아르칸의 앞발이 방어하려던 다리를 밀어내며 옆구리를 베었다.
푸른 반격이 뒤늦게 따라갔다. 연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흩어졌을 뿐, 검은 털 한 올 붙잡지 못했다. 지르렉스는 다음 기척을 찾으려 고개를 낮췄다. 바로 정면의 그림자가 갑자기 깊어졌다.

세 번째 순간이동은 지르렉스의 정면에서 끝났다. 아르칸은 뒷발로 땅을 밀어, 낮게 내렸던 앞발을 가슴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지르렉스가 들어 올리던 방어가 충격에 벌어졌다.
고개가 젖혀지는 동안에도 전기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발을 딛고 있던 늑대는 사라진 뒤였다. 지르렉스의 앞에 빈 땅이 드러나고, 이번에는 뒤쪽 옆구리에서 공기가 찢어지는 기척이 났다.

네 번째에는 커다란 몸 자체가 날아들었다. 옆구리 뒤쪽에서 나타난 아르칸이 어깨를 낮춰 들이받자 지르렉스의 뒷발이 미끄러졌다. 큰 바위에 기대려던 몸이 반대쪽으로 밀려났다.
지르렉스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꼬리를 뻗었다. 정면을 가르던 전기가 방향을 바꿀 무렵, 들이받은 늑대의 몸은 벌써 흩어졌다. 남은 것은 상처 사이로 번지는 통증과 바닥을 스치는 검은 연기뿐이었다.

다섯 번째 형체는 반대편에서 낮게 돌았다. 아르칸의 긴 꼬리를 따라 압축된 검은 바람이 휘어졌고, 꼬리 끝이 지나간 자리에서 날카로운 선이 지르렉스의 몸을 가로질렀다.
지르렉스는 아들이 있는 쪽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반격이 늑대의 등 뒤를 따라갔지만 이번에도 연기만 흩어졌다. 그가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머리 위의 하늘이 검어졌다.

여섯 번째 공격은 위에서 떨어졌다. 지르렉스가 올려다본 순간, 검은 연기를 밀고 나온 아르칸의 두 앞발이 어깨를 향해 내려꽂혔다. 버티던 다리가 휘청이고 땅이 낮게 울렸다.
지르렉스는 남은 전기를 위로 쏟았다. 푸른 줄기는 방금 늑대가 나타났던 공간을 뚫었지만, 그 무게는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아르칸은 또 다른 방향에서 몸을 모으고 있었다. 여섯 번을 막으려 한 지르렉스에게는 자세를 바로잡을 틈조차 없었다.

마지막에는 검은 바람이 거대한 송곳니로 모였다. 아르칸이 비스듬한 정면에서 나타나 턱을 벌리자, 주위의 바람까지 함께 지르렉스를 향해 닫혀 들었다. 지르렉스의 전기는 머리 위에 남은 연기를 꿰뚫고 사라졌다.
지르렉스으아악!
일곱 번째 충격에 거대한 몸이 땅에 부딪쳤다. 검은 파문이 바닥을 쓸고 지나가고, 꼬리 끝에서 튄 전기가 빈 공중에서 끊겼다. 지르렉스는 아들 쪽으로 고개를 들려다가 힘없이 내려놓았다. 아르칸은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르렉스: 으아악!

준호는 품 안의 지지를 놓지 않은 채 지르렉스를 바라봤다. 크게 다친 몸이 일어나지 못했다. 아르칸의 앞발 아래에서는 검은 연기가 다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루비가 준호 곁에 멈춰 서자 아르칸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아르칸다음에도 내 앞길을 막으면 너라 할지라도 용서치 않는다.
준호가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아르칸은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갈기와 꼬리가 연기 속으로 풀리더니 바위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준호는 쫓아갈 수 없었다. 팔 안의 작은 몸과 눈앞에 쓰러진 아버지를 두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같은 날을 말하던 두 목소리는 끝내 만나지 못했다. 숲에는 연기 냄새가 남아 있었고, 준호의 손에는 신고가 건넨 수신기가 차갑게 닿아 있었다.
아르칸: 다음에도 내 앞길을 막으면 너라 할지라도 용서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