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호가 마지막 붕대를 걷어 내자 찌루가 앞발을 쭉 뻗었다. 따끔거림도, 힘을 줄 때마다 오던 통증도 사라져 있었다. 모아는 포리 주위를 한 바퀴 달렸고, 시루는 두리에게 몸을 부딪치며 장난을 걸었다. 여섯 펫이 멀쩡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민정도 구급상자를 닫았다. 조금 전의 싸움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숲은 조용했다.
가방을 다시 꾸리던 남정이 손을 멈췄다. 발밑의 자갈이 잘게 떨리더니, 몇 걸음 떨어진 땅이 둥글게 솟아올랐다. 준호가 친구들을 뒤로 물리는 순간 흙이 와르르 무너지며 커다란 뿔이 나타났다. 그 뒤로 바위 갑옷을 두른 코뿔소가 몸을 밀어 올렸다.
두리그라코스 삼촌!
준호가 말릴 틈도 없이 두리가 달려갔다. 흙먼지를 털던 그라코스는 그 목소리에 귀를 세우더니, 커다란 몸을 낮춰 두리를 맞았다.
그라코스두리야! 여기서 널 다 보는구나!
두리가 앞다리에 매달리자 그라코스는 뿔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두르간과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였다. 두리에게는 아버지 곁에서 늘 보던, 그래서 삼촌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어른이었다.
두리: 그라코스 삼촌!
그라코스: 두리야! 여기서 널 다 보는구나!

반가워서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두리의 입이 문득 멈췄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목 안쪽이 꽉 막혔다. 그라코스는 두리가 제 다리를 더 세게 붙드는 것을 느끼고 웃음을 거두었다.
두리삼촌, 우리 아빠 못 봤어요?
두리는 어둠이 마을에 온 뒤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아무리 찾아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서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라코스는 곧장 괜찮을 거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두르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숲 너머를 바라보던 그가 두리에게 다시 눈을 맞췄다.
그라코스단군님이라면 무언가 아실지도 모르겠구나.
대지 마을의 신 단군은 땅에 남은 기운을 살필 수 있다고 했다.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약속은 아니었지만, 두리에게는 처음으로 물어볼 곳이 생긴 셈이었다. 준호가 일행을 돌아보자 민정이 먼저 가방을 멨다. 남정도 두리 옆으로 다가와, 함께 가 보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리: 삼촌, 우리 아빠 못 봤어요?
그라코스: 단군님이라면 무언가 아실지도 모르겠구나.

근처 텔레포트까지 가는 짧은 길에서도 펫 여섯 마리는 자꾸 서로의 앞을 가로질렀다. 모아를 따라가던 포리 때문에 남정이 멈추고, 그 뒤를 보던 두리가 시루와 부딪쳤다. 준호는 웃다가도 길을 건널 때마다 모두 있는지 다시 세어야 했다.
민정펫볼 안에 들어가서 이동하는 건 어때? 도착하면 바로 꺼내 줄게.
단군을 빨리 만나고 싶었던 두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친구들도 동의하자 세 아이가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펫볼들을 꺼냈다. 붉은 윗면과 흰 아랫면 사이, 둥근 버튼에서 옅은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모아대지 마을에서 보자!
준호그래, 순서대로 천천히.
모아가 앞발을 흔들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포리, 두리, 시루가 차례로 빛에 감싸였다. 준호가 두 손에 든 펫볼에서는 찌루와 루비를 향해 푸른빛이 뻗었다. 둘도 다른 친구들처럼 몸을 맡겼다. 찌루의 모습이 사라지고, 루비의 발끝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준호: 그래, 순서대로 천천히.
모아: 대지 마을에서 보자!

다른 다섯 펫이 모두 들어가고 펫볼이 조용해졌다. 루비도 그대로 들어가는 듯했는데, 다음 순간 몸을 감싸던 빛이 안쪽에서 밀려 나오듯 흩어졌다. 루비의 몸이 뒤로 툭 튕겼다. 준호가 얼른 손을 뻗었지만 루비는 이미 네 발로 땅을 짚고 있었다.
루비나도 들어가려고 했다고!
준호왜 너만 안 들어가지?
준호는 버튼을 확인하고 다시 시도했다. 루비도 이번에는 앞발을 모으고 꼼짝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다른 펫볼로 바꾸어도 빛은 루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친 곳은 모두 나아 붕대도 없었고, 루비가 일부러 버티는 것도 아니었다.
그라코스가 가까이 와 펫볼과 루비를 번갈아 살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루비는 괜히 자기 배와 꼬리를 내려다봤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 자신에게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장난처럼 웃어넘기기에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준호: 왜 너만 안 들어가지?
루비: 나도 들어가려고 했다고!

펫을 데리고 텔레포트를 쓰려면 먼저 펫볼 안에 넣어야 했다. 루비를 두고 갈 수는 없으니 모두의 이동이 막힌 셈이었다. 그라코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준호 앞에 앞다리를 굽혔다.
그라코스너희 둘은 내 등에 타라. 대지 마을까지 데려다주마.
민정그럼 우린 먼저 가서 단군님을 찾아볼게.
준호는 찌루가 들어 있는 펫볼이 주머니 안에 잘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민정과 남정은 나머지 네 친구의 펫볼을 챙겨 텔레포트 위로 올라갔다. 남정이 손을 크게 흔들자 돌바닥의 문양에 빛이 돌았고, 남매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준호는 바위 갑옷의 틈을 딛고 올라가 그라코스의 넓은 등에 자리를 잡았다. 루비도 바로 앞에 앉았다. 흔들리지 않도록 한 팔로 루비를 감싼 뒤 준호가 준비됐다고 말하자, 그라코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리서 보기만 했던 숲길이 높아진 시야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그라코스: 너희 둘은 내 등에 타라.
민정: 그럼 우린 먼저 가서 단군님을 찾아볼게.

그라코스의 걸음에 익숙해질 무렵, 물소리 사이로 길게 끊기는 울음이 들렸다. 루비가 먼저 귀를 세웠다. 준호도 등에 탄 채 나뭇가지 사이를 들여다봤다. 물가의 큰 나무 아래, 갈색 늑대가 누군가를 앞발로 흔들고 있었다.
늑구루루야, 눈 좀 떠 봐…!
준호늑구? 무슨 일이야!
그라코스가 즉시 걸음을 멈췄다. 표정이 굳어진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준호에게도 루루가 보였다. 숲으로 떠날 때 늑구의 앞을 막아 서던 몸이 지금은 바닥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나뭇잎 장식은 먼지투성이였고, 숨을 쉬는지 알아보려면 한참을 들여다봐야 했다.
준호와 루비는 아직 그라코스의 등 위에 있었다. 늑구가 고개를 들었을 때, 준호는 서둘러 내려갈 곳을 찾고 있었다. 그라코스가 무릎을 굽혀 주자 그는 가방을 끌어안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준호: 늑구? 무슨 일이야!
늑구: 루루야, 눈 좀 떠 봐…!

늑구는 말을 꺼내려다가 숨부터 삼켰다. 숲길에서 지르렉스를 만났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푸른 전기를 두른 도마뱀이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이었다.
늑구루루가… 내 앞을 막았어. 나 대신 싸웠는데…
늑구의 눈앞에는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루루가 가지를 뻗어 전기를 막는 동안, 자신은 나무뿌리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도와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발이 더 심하게 떨렸다. 루루가 밀려나는 것을 보면서도 한 걸음 나가지 못했다.
루루늑구한테 손대지 마!
기억 속 루루의 외침이 끝나자 늑구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때 움직이지 않았던 앞발로 지금은 루루를 붙들고 있었다.
늑구난…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했어.
준호는 늑구를 탓하는 대신 가방을 열었다. 세로에게 되찾아 둔 생명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병을 꺼내는 소리에 늑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루루: 늑구한테 손대지 마!

준호는 루루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손으로 받치고 입가에 생명수를 조금씩 흘려 넣었다. 얼마 전까지 같은 물을 마시고 모두 일어났었다. 늑구는 루루가 눈을 뜨는 순간을 놓칠까 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늑구이거 마시면 낫는 거잖아. 그렇지?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루의 몸을 감싼 빛은 금세 흩어졌고, 얕은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 더 이름을 불렀지만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라코스가 낮게 고개를 숙였다. 준호의 손이 병을 든 채 멈춘 것을 보고도 늑구는 루루를 계속 흔들었다.
늑구루루야… 일어나. 이제 가자.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루루는 세상을 떠났다. 준호는 천천히 병을 내려놓았고, 루비는 늑구 곁으로 다가가려다 멈췄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늑구는 루루의 앞발을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채,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아주 작게 되풀이했다.
늑구: 루루야… 일어나. 이제 가자.

얼마 뒤 늑구가 준호의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몸을 일으킨 늑구가 소년의 소매를 붙잡았다.
늑구은 속성 열매, 아직 있지? 나한테 줘. 제발.
준호그건 하나밖에 없었어. 전에 그 상어가 먹은 게 전부야.
늑구도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열매를 놓쳤고, 작은 상어가 그것을 먹는 것까지 보았다. 그런데도 가방 안에는 하나쯤 더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약한 채로 남으면 루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늑구하나만 더 찾아봐. 나도 쎄져야 해. 지르렉스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준호가 빈 안쪽 주머니까지 펼쳐 보였지만 늑구는 소매를 놓지 않았다. 부탁은 점점 울음으로 바뀌었다. 루비는 이를 악문 늑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찌루가 쓰러졌을 때 자기 가슴을 가득 채웠던 뜨거움이 떠올랐지만, 지금 늑구에게 건넬 수 있는 열매도, 대답도 없었다.
늑구: 은 속성 열매, 아직 있지? 나한테 줘. 제발.
준호: 그건 하나밖에 없었어.

말없이 듣던 그라코스가 입을 열었다.
그라코스그토록 힘을 원한다면… 어둠을 찾아가라. 어둠은 펫에게 힘을 준다.
준호안 돼, 늑구! 그건 너무 위험해!
루비도 놀라 그라코스를 올려다봤다. 마을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을 공격한 그 어둠이었다. 준호가 늑구 앞에 몸을 낮추며 다른 방법을 찾자고 했지만, 늑구는 이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힘을 준다는 한마디만 머릿속에서 자꾸 되풀이됐다.
루비늑구, 잠깐만! 같이 생각해 보자!
늑구는 루루 앞에 다시 멈춰 섰다. 이마를 잠깐 맞댄 뒤 몸을 돌렸을 때, 눈물은 여전히 흘렀지만 발은 망설이지 않았다. 준호가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숲속으로 달려갔다. 바람이 수풀을 흔들더니 갈색 꼬리마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셋은 곧바로 길을 떠나지 못했다. 그라코스가 나무 아래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 냈고, 준호와 루비는 루루를 볕이 드는 자리에 눕혀 주었다. 준호는 잎사귀를 한 장 내려놓았다. 늑구가 돌아오면 친구가 어디 있는지는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라코스: 그토록 힘을 원한다면… 어둠을 찾아가라.
준호: 안 돼, 늑구! 그건 너무 위험해!

대지 마을에 닿았을 때는 돌담마다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벽을 보수하고 식량을 나르고 있었다. 준호는 그라코스의 등에서 내려 루비와 함께 넓은 돌계단을 올랐다. 오래된 소나무 아래 돌 제단 곁에서 민정이 손을 들었다.
민정준호야! 여긴 벌써 두리를 도와주고 계셔.
남매는 두리를 펫볼에서 꺼내 단군에게 사정을 전한 뒤였다. 흰 포에 소박한 관모를 쓴 단군은 긴 수염을 드리운 채 돌바닥에 손을 대고 있었다. 곁에서는 거대한 발톱을 가진 두더지가 석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준호를 보자 들고 있던 기록을 내려놓고 자리를 내주었다.
그란토저는 단군님을 보좌하는 비서, 그란토입니다.
준호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늑구와 루루의 이야기는 아직 목 안에 걸려 있었다. 당장 자세히 묻지 않는 민정에게 고마워하며, 그는 단군 앞에서 기다리는 두리 곁에 앉았다. 그라코스는 입구 쪽에 서서 오랜 친구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민정: 준호야! 여긴 벌써 두리를 도와주고 계셔.
그란토: 저는 단군님을 보좌하는 비서, 그란토입니다.

단군의 손끝에서 옅은 금빛이 돌바닥의 결을 따라 퍼졌다. 산과 골짜기의 윤곽이 잠시 떠올랐지만, 어느 지점부터 검은 기운에 가려 더 이어지지 않았다. 두리가 목걸이를 꼭 붙들었다. 단군은 눈을 뜬 뒤에도 한동안 그 어둠이 남은 자리를 보고 있었다.
단군어둠의 기운은 느껴진다. 하지만 두르간이 어디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구나.
두리는 무언가 더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단군은 찾지 못한 자리를 찾았다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대신 산 너머를 가리켰다. 윗동네 전기 마을이 어둠 마을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그곳에서 어둠의 움직임을 아는 이들을 만나 보라고 했다.
준호그럼 전기 마을로 가 볼게요.
그란토가 펼친 지도에는 두 마을 사이를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산을 돌아 걸으면 한 달이 넘게 걸릴 수 있었다. 텔레포트 이야기가 나오자 준호는 루비만 펫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루비가 아무 말 없이 꼬리를 당겼다. 단군은 그 작은 여우를 바라보고는, 다시 산이 그려진 지도로 시선을 내렸다.
단군: 어둠의 기운은 느껴진다.
단군: 하지만 두르간이 어디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구나.

단군은 곁에 선 두리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를 찾겠다는 말에 매달려 여기까지 온 작은 곰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단 아래에서는 무너진 담을 보수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고, 사람들은 어둠의 공격에 대비할 일을 묻기 위해 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군대지 마을도 어둠의 공격에 대비할 일이 많구나. 곁에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두리의 귀가 조금 처졌다. 단군은 아이가 고개를 떨구기 전에 말을 이었다.
단군그래도 전기 마을로 갈 길은 열어 주마.
단군의 손이 지도 위의 거대한 산을 짚었다. 산을 뚫는 것은 단지 한 달 넘는 걸음을 줄이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마을을 지켜 준 장벽에 구멍이 생기면 어둠도 그 통로로 넘어올 수 있었다. 길을 내준 뒤에는 그 입구를 지킬 병력과 방비까지 새로 마련해야 했다.
단군길을 열면 우리 마을도 위험을 더 떠안게 된다. 그 위험을 알면서도 너희가 갈 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겠구나.
두리가 목걸이를 잡고 있던 앞발을 내렸다. 단군이 감수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단군은 지팡이를 바로 세운 뒤 곁에서 기다리던 비서를 향해 돌아섰다.
단군그란토, 산을 뚫어 길을 내주거라.
그란토예, 단군님!
그란토는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았다. 기록하던 석판을 내려놓고 굵은 발톱을 펼치자 검은 돌 갑옷의 틈에서 옅은 금빛이 흘렀다. 심층 관통으로 일행의 길을 열 준비였다. 두리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준호와 남매도 그 뒤를 따랐다.
단군: 곁에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단군: 그래도 전기 마을로 갈 길은 열어 주마.
단군: 그란토, 산을 뚫어 길을 내주거라.
그란토: 예, 단군님!

산 아래에 서자 지도에서 보던 거리감은 사라졌다. 고개를 한껏 젖혀도 바위 능선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란토는 일행을 튀어나온 암벽 뒤로 물린 다음, 앞발을 벌려 산의 표면을 짚었다. 어두운 돌 갑옷 틈으로 금빛이 번졌다.
그란토심층 관통!
두 발톱 사이에 모인 힘이 가늘고 눈부신 선으로 뻗었다. 다음 순간 그 선을 따라 산속 깊은 곳까지 굉음이 울렸다. 겹겹의 암반이 안쪽으로 밀려나고, 황금빛 나선이 흙먼지를 끌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축이 흔들리자 준호는 루비를 품으로 당겼고, 민정은 남정의 어깨를 잡아 흔들리는 몸을 세웠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 산에는 커다란 입구가 생겨 있었다. 그란토는 한동안 호흡을 고른 뒤 안쪽 벽에 발톱을 대어 살폈다. 길은 뚫렸지만 건너편의 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리는 그 어두운 입구를 보며, 아버지에게 가는 길도 저 안 어딘가와 이어져 있기를 바랐다.
그란토: 심층 관통!

단군은 마을로 돌아가 새로 열린 길의 경계를 준비해야 했다. 그란토도 입구에 남아 암벽을 확인했다. 준호는 찌루를 펫볼에서 꺼냈고, 민정과 남정도 모아와 포리, 시루를 불렀다. 이미 밖에 있던 두리까지 여섯 친구가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누구도 앞서 달리지 않았다.
그란토벽에서 떨어져 걷고, 서로 놓치지 마십시오. 아직 끝이 먼 길입니다.
루비가 앞장서자 작은 꼬리 불꽃이 울퉁불퉁한 바닥을 비췄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에 돌 하나, 갈라진 틈 하나가 차례로 드러났다. 준호는 루비가 비춘 자리만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고, 뒤에서는 남정이 두리와 시루가 따라오는지 돌아봤다.
준호모두 가까이 붙어. 루비 불빛을 따라가자.
루비응. 앞은 내가 비출게.
멀어지는 입구의 빛이 세 아이의 어깨에서 사라졌다. 루비는 잠깐 뒤를 돌아 친구들의 얼굴을 세어 본 뒤 꼬리를 조금 높이 들었다. 작은 불빛이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일행은 그 빛이 닿는 만큼씩, 길고 어두운 산속으로 들어갔다.
준호: 모두 가까이 붙어. 루비 불빛을 따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