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오가 넓혀 놓은 땅굴에서는 아직도 돌가루 냄새가 났다. 찌루네 집을 나선 뒤에도 루비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단단한 바위를 뚫고 나아가던 전기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번쩍이는 빛만 보였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막혀 있던 곳에 사람이 지나갈 만한 길이 생겨 있었다.
루비와, 너희 형 진짜 쎄다! 너도 저렇게 변하고 쎄져?
찌루그렇겠지? 근데 형은 훈련을 정말 많이 했어.
루비나도 훈련하면 저렇게 쎄질 수 있을까?
루비: 와, 너희 형 진짜 쎄다! 너도 저렇게 변하고 쎄져?
찌루: 그렇겠지? 근데 형은 훈련을 정말 많이 했어.

찌루가 루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얘기라면 하루 종일 할 수 있었지만, 루비가 자라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는 찌루도 궁금했다. 벽에 걸린 등불을 하나 지나며 찌루가 물었다.
찌루너희 종족은 어떻게 변해? 어떤 기술이 제일 쎄?
루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두 발짝쯤 더 가다가 멈추자 찌루도 따라 멈췄다. 루비의 귀가 조금 내려갔다. 어려운 질문을 받은 표정이라기보다, 어디에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루비나는 가족 없이 혼자 자라서… 잘 몰라.
루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걸으려 했다. 하지만 찌루는 그 말끝에 남은 망설임을 듣고, 한 걸음 먼저 나가 루비 옆에 붙었다.
찌루: 너희 종족은 어떻게 변해? 어떤 기술이 제일 쎄?
루비: 나는 가족 없이 혼자 자라서… 잘 몰라.

찌루는 잠깐 생각하더니 루비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위로가 될 만한 멋진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같이 할 수 있는 일은 떠올랐다.
찌루같이 훈련하면서 알아보자. 내가 네 가족이 되어 줄게.
루비는 찌루를 빤히 바라봤다. 장난인지 확인하려는 듯 코끝을 조금 내밀었지만, 찌루는 피하지 않았다. 어제는 놀라서 서로 공격했던 고슴도치가 오늘은 바로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루비정말?
찌루응. 너도 나랑 가족 하고 싶으면.
루비가 먼저 이마를 내밀었다. 찌루는 가시가 닿지 않게 고개를 기울여 부드러운 이마를 맞댔다. 한 번 살짝 문지르자 둘 다 간지러운 얼굴이 됐지만, 아무도 먼저 물러서지 않았다.
루비그럼 오늘부터… 우리 가족이다.
찌루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금 더 그렇게 있다가 나란히 걸음을 뗐다. 루비가 앞서면 찌루가 따라붙고, 찌루가 모퉁이를 돌기 전에 루비를 기다렸다. 준호에게 돌아가는 길이 아까보다 짧게 느껴졌다.
찌루: 같이 훈련하면서 알아보자. 내가 네 가족이 되어 줄게.
루비: 그럼 오늘부터… 우리 가족이다.

간호하던 방 앞에 도착하자 루비가 먼저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조금 전까지 물통과 붕대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포리가 누웠던 담요는 접혀 있었고, 두리와 시루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준호는 모아 곁에 앉아 젖은 천을 갈아 주고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준호가 두 펫에게 조용히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루비와 찌루는 이번에는 앞다투지 않고 나란히 모아의 침상 앞으로 갔다.
루비다들 어디 갔어? 모아는 아직도 자?
준호생명수를 구하러 갔어. 모아는 아직 못 깨어났고.
준호는 민정과 남정이 포리, 두리, 시루와 함께 펫샵으로 떠났다고 설명했다. 포리가 생명수라면 모아를 도울 수 있다고 했다는 말에 찌루가 모아의 얼굴을 살폈다.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고, 붕대 아래 가슴만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루비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형 이야기를 잠시 삼켰다. 방에는 모아의 숨소리와 준호가 천을 짜는 소리가 작게 남았다.
루비: 다들 어디 갔어? 모아는 아직도 자?
준호: 생명수를 구하러 갔어. 모아는 아직 못 깨어났고.

모아가 다시 잠잠해지자 루비는 준호의 무릎에 앞발을 살짝 올렸다. 태오가 전기로 길을 뚫은 이야기, 찌루와 같이 훈련하기로 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준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라고 하자 루비도 목소리를 낮췄지만, 들뜬 꼬리까지 가만히 두기는 어려웠다.
루비준호, 우리 밖에서 훈련하자! 나도 쎄지고 싶어.
준호모아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어.
루비는 출구를 봤다가 모아를 봤다. 잠깐만 다녀오자는 말을 꺼내려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얼굴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다시 벽 옆에 앉아 기다릴 마음도 좀처럼 들지 않았다. 태오처럼 강해지면, 다음에는 이렇게 지켜보기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루비그럼 모아도 같이 가면 안 돼? 내가 옆에 있을게.
준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민정에게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자리를 비워도 될지, 모아를 옮기다가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한편으로는 천을 갈아 주며 기다리는 것만으로 모아가 깨어날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조급했다.
가방을 뒤적이던 준호의 손에 작은 펫볼이 잡혔다. 준호는 그걸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봤다.
루비: 준호, 우리 밖에서 훈련하자! 나도 쎄지고 싶어.
준호: 모아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어.

펫볼은 준호가 한 손으로 감쌀 만큼 작았다. 모아를 안에 넣으면 품에 계속 안고 걷지 않아도 함께 데려갈 수 있었다. 준호는 먼저 붕대가 풀린 곳이 없는지 살피고, 모아의 턱 아래에 접힌 천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준호모아, 잠깐만 안에 있어. 너도 같이 가자.
작은 버튼을 누르자 옅은 빛이 모아의 몸을 감쌌다. 루비가 놀라 한 발 다가섰지만 찌루가 옆에서 기다리자 같이 멈췄다. 모아의 모습은 빛을 따라 천천히 펫볼 안으로 모였고, 침상에는 몸이 눌렀던 자국만 남았다.
준호는 펫볼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데리고 갈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다. 모아가 나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지금 필요한 건 여전히 생명수였다.
준호훈련만 하러 나가는 건 아니야. 펫샵으로 가서 민정이랑 남정을 만나자. 모아를 도울 방법이 더 있는지도 물어보고.
루비는 이번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찌루도 곁에 서서 펫볼을 한 번 들여다봤다. 준호는 깨끗한 천과 물을 챙긴 뒤, 혹시 일행과 길이 엇갈릴까 봐 펫샵으로 간다는 쪽지를 빈 물통 옆에 남겼다.
준호: 모아, 잠깐만 안에 있어. 너도 같이 가자.

준호가 가방을 메고 방을 나섰다. 손안의 펫볼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고쳐 감싼 뒤, 벙커 안쪽에서 철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랐다. 루비와 찌루도 한 단씩 따라 올라왔다. 찌루는 루비의 다친 앞발을 보고 속도를 맞췄다.
준호우리도 펫샵으로 가자. 모아를 낫게 할 방법부터 찾는 거야.
루비알았어. 가는 길에 위험한 게 있으면 내가 먼저 알려 줄게.
찌루혼자 먼저 뛰어나가진 말고. 같이 하기로 했잖아.
루비가 찌루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준호는 둘의 달라진 분위기가 조금 신기했지만, 지금은 자세히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철문 너머의 바깥 계단을 먼저 살핀 다음 두 펫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지상에서 내려오는 바람에는 벙커의 축축한 냄새 대신 흙먼지와 타다 남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준호는 펫볼을 가슴 가까이 붙였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환한 낮빛 속에 부서진 마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준호: 우리도 펫샵으로 가자. 모아를 낫게 할 방법부터 찾는 거야.

그보다 먼저 펫샵 앞에 도착한 민정은 남정의 어깨를 붙잡고 걸음을 멈췄다. 포리가 기억하던 초록 차양은 반쯤 찢어져 있었고, 진열창이 있던 자리에는 깨진 나무틀만 매달려 있었다. 문 위의 간판이 기울어진 채 바람에 삐걱거렸다.
민정여기도 공격당했어… 안에 누구 계세요?
남정은 생명수를 사서 돌아갈 생각만 하느라 주머니 속 동전을 몇 번이나 세어 봤다. 그런데 막상 가게를 찾고 보니 값을 물어볼 카운터부터 무너져 있었다. 손에 쥔 동전이 갑자기 쓸모없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시루가 문 앞에 코를 가까이 대고 안을 살폈다. 포리는 유리 조각을 피해 남정 곁으로 붙었고, 두리는 무너진 벽 뒤를 들여다봤다. 혹시 아버지의 흔적이 있을까 싶었지만, 먼지 속에는 쓰러진 선반뿐이었다.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이마에 작은 붕대를 붙인 남자가 카운터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먼지투성이 앞치마를 털던 그는 아이들과 펫들을 발견하자 넘어온 못을 조심하라며 손부터 내밀었다.
민정: 여기도 공격당했어… 안에 누구 계세요?

민정은 주인이 가리킨 안전한 쪽으로 남정을 먼저 들여보냈다. 가까이서 보니 선반의 병들은 깨졌거나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안쪽 창고에는 남아 있을지 몰랐다. 민정은 모아가 다친 뒤로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다고 급히 설명했다.
민정생명수 남은 건 없나요? 친구가 깨어나질 않아요.
주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는 쓰러진 약장을 일으키려다 손을 멈추고, 빈 칸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주인전부 없어졌단다. 도망친 펫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어둠이 가게를 덮쳤을 때, 주인은 무너지는 지붕 아래에서 펫들을 내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때 빠져나간 펫은 늑구, 세로, 꼬마, 뾰롱이, 루루였다. 몇몇이 물건을 챙겨 나가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먼지와 연기 때문에 무엇을 들었는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주인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명수를 담아 둔 곳도 비었더구나. 그 애들 중에 가져간 애가 있을 것 같긴 한데, 누군지는 나도 모르겠어.
남정다 도망쳤으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세요?
주인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둑질하러 온 것도 아니고, 다들 살려고 뛰쳐나간 상황이었다. 민정은 깨진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누굴 탓해도 모아에게 가져갈 생명수가 생기지는 않았다.
포리가 민정의 신발에 앞발을 댔다. 아직 포기하지 말라는 듯, 이번에는 무너진 뒷문 쪽으로 귀를 세우고 있었다.
민정: 생명수 남은 건 없나요? 친구가 깨어나질 않아요.
주인: 전부 없어졌단다. 도망친 펫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뒷문 밖의 흙바닥에는 여러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작은 발톱 자국 옆으로 깊게 찍힌 발굽 자국이 지나갔고, 골목 모퉁이에서는 흔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남정은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짚어 보다가 금세 손을 거두었다. 아무렇게나 건드리면 남아 있는 단서까지 망칠 것 같았다.
남정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르는데, 다 찾아봐야겠네.
민정응. 모아가 기다리잖아. 하나씩 찾아보자.
민정은 종이에 다섯 이름을 적었다. 늑구, 세로, 꼬마, 뾰롱이, 루루. 이름 옆에 주인이 알려 준 생김새를 짧게 덧붙이는 동안 포리와 시루가 낮은 담장을 따라 흔적을 살폈다. 두리도 곁을 지켰다. 골목 너머에서 큰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이번에는 혼자 달려가지 않았다.
두리찾으면서 아빠도 봐 줘.
남정응. 두르간도 계속 찾아볼게. 우리 떨어지지 말자.
시루가 코를 들고 골목 입구를 바라봤다. 민정은 주인에게 친구들이 오면 자신들이 펫들을 찾으러 갔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남정의 가방끈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고, 세 펫과 함께 첫 번째 갈림길로 향했다.
주머니에는 아직 생명수 값으로 챙긴 동전이 그대로 있었다. 돌아갈 때는 그 동전 대신 작은 병 하나를 꼭 쥐고 있기를 바라며, 남정은 누나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남정: 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르는데, 다 찾아봐야겠네.
민정: 응. 모아가 기다리잖아. 하나씩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