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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3 · 햇살 들판 · 지하 벙커

3화. 여행의 시작

1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철문을 닫고 나서야 민정의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준호는 바닥의 짐을 밀어내고 담요 네 장을 나란히 폈다. 남정이 두리와 시루를 내려놓는 동안, 민정은 품에 안은 모아와 포리의 가슴이 움직이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너무 무거웠던 몸들이 손을 놓자 지나치게 작아 보였다.

준호물부터 갈자. 깨끗한 천도 더 필요해.

아무도 왜 싸웠는지 묻지 않았다. 남정은 젖은 붕대를 풀었고, 준호는 상처에 붙은 먼지를 조금씩 닦아 냈다. 민정은 모아의 얼굴에 묻은 흙을 닦다가 손을 멈췄다. 자신에게 처음 안겼을 때는 그 작은 앞발이 옷깃을 얼마나 세게 붙잡았는지 기억났다. 지금은 손바닥을 대어도 아무 힘이 실리지 않았다.

민정모아야, 조금만 버텨 줘. 내가 옆에 있을게.

문 옆에서 지켜보던 루비가 한 발 다가섰다가 멈췄다. 누울 자리는 네 마리 몫으로 꽉 차 있었고, 아이들은 물을 갈고 붕대를 묶느라 바빴다. 준호가 고개를 들어 괜찮다는 뜻으로 끄덕이자 루비는 통로를 비켜 주었다. 찌루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둘은 잠시 기다렸지만, 지금 당장 거들 만한 일은 없어 보였다.

준호: 물부터 갈자. 깨끗한 천도 더 필요해.

민정: 모아야, 조금만 버텨 줘. 내가 옆에 있을게.

2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루비는 앞발을 포갰다가 풀고, 다시 담요 쪽을 바라봤다. 찌루도 고개만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루비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가만히 앉아 있기는 둘 다 조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찌루우리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우리 집에 놀러 갈래?

루비의 귀가 쫑긋 섰다. 집이라고 하면 계단을 올라가 마을로 나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찌루가 가리킨 곳은 출구와 반대편, 등불이 이어진 벙커 안쪽이었다.

루비네 집이 이 안에 있어?

찌루응. 누나랑 큰형도 저쪽에 있어. 내가 안내해 줄게.

루비가 준호를 돌아보자, 준호는 젖은 천을 짜던 손을 잠시 멈췄다. 찌루가 자기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자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부르면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루비는 알겠다는 듯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찌루가 먼저 통로로 나섰다. 루비는 다친 앞발에 무리가 가지 않게 천천히 뒤따랐다. 찌루가 한 번 돌아보고 걸음을 늦추자 둘의 보폭이 맞았다. 방 안에서는 물을 갈아 붓는 소리가 들렸고, 둘의 앞에는 처음 보는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찌루: 우리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우리 집에 놀러 갈래?

루비: 네 집이 이 안에 있어?

3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찌루는 벙커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기둥 뒤에 가려진 좁은 통로를 지나고, 루비가 막다른 곳이라고 생각한 선반 옆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루비가 따라가다 코로 먼지를 들이마시자, 찌루는 웃음을 참으며 덜 지저분한 쪽으로 길을 바꿨다.

통로 끝에는 낮은 등불 하나와 담요를 깐 방이 있었다. 보랏빛 가시 끝에 금빛 무늬가 번지는 고슴도치가 빈 통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루비와 찌루보다 어깨 높이가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고슴도치가 앞발을 포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루비가 문턱에 발을 올리자 큰 고슴도치의 한쪽 눈이 먼저 열렸다.

찌루우리 누나 라니(찌루크)랑 큰형 태오(찌르가스)야!

라니안녕, 반가워. 편하게 들어와.

셋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루비의 시선이 결국 태오의 커다란 가시에 멎었다. 찌루가 가슴을 내밀자 라니가 앞발로 동생의 흐트러진 가시를 살짝 눌렀다.

루비안녕. 나는 루비야.

라니또 혼자 구석에서 잤어? 네 자리 비어 있어서 찾았잖아.

찌루는 아까 창고에서 벌어진 일은 쏙 빼고 새 친구를 만났다고만 말했다. 루비가 슬쩍 쳐다보자, 찌루는 못 본 척 빈 담요를 팡팡 두드렸다. 태오가 몸을 옆으로 옮겨 자리를 내 주었고, 루비도 그제야 문턱을 넘었다.

찌루: 우리 누나 라니(찌루크)랑 큰형 태오(찌르가스)야!

라니: 안녕, 반가워. 편하게 들어와.

4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루비가 태오의 커다란 가시 끝을 자꾸 올려다봤다. 금빛 무늬 사이로 가느다란 전기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태오가 앞발을 펴 보였다. 작은 전류가 두 앞발 사이에 모여 고리를 만들더니, 루비의 코앞에 닿기 전에 방향을 틀어 자기 등으로 되돌아갔다.

태오전기를 그냥 터뜨리는 거랑, 다루는 건 다르거든.

태오는 벙커 안쪽으로 일행을 데려갔다. 침상과 저장고를 지나자 바닥에 돌가루가 쌓인 땅굴이 나왔다. 끝은 두꺼운 바위로 막혀 있었다. 태오는 이 길을 넓혀 두면 피난민들이 더 들어올 수 있고, 막힌 통로도 이어 볼 수 있다고 했다. 라니가 루비와 찌루를 튼튼한 기둥 뒤쪽에 세웠다.

가느다란 전류 여러 줄이 먼저 바위의 틈을 더듬었다. 다음에는 그 줄기들이 한곳으로 꼬이며 밝은 나선이 되었다. 아까 앞발 사이에서 장난처럼 돌던 빛이 굵어질수록 땅바닥의 자갈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루비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낮췄다.

태오잘 봐. 한 번에 뚫는다!

태오가 네 발을 단단히 디디자 등 전체의 가시가 일제히 빛났다. 커다란 번개 줄기가 땅굴 끝으로 내리꽂혔다. 바위 한가운데가 하얗게 번쩍이더니 굵은 균열이 사방으로 뻗었다. 첫 겹이 무너지자 그 뒤의 바위까지 연달아 갈라졌다. 굉음이 땅굴을 울렸고, 회전하는 전류는 부서진 돌을 안쪽으로 밀어내며 통로의 벽을 넓게 깎아 냈다.

루비는 귀를 눕히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태오는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빛을 쏟아 내면서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마침내 전기가 잦아들고 먼지가 가라앉자, 조금 전까지 막혀 있던 곳에 여러 마리가 나란히 걸을 만큼 넓은 길이 생겨 있었다.

루비우와… 길이 생겼어!

찌루가 자기 형을 보라며 신나게 가슴을 내밀었다. 라니는 떨어질 돌이 없는지 살핀 뒤에야 둘을 기둥 뒤에서 나오게 했다. 루비는 새로 생긴 길의 가장자리에 앞발을 대었다. 따뜻한 돌에서 전기의 여운이 가늘게 느껴졌다. 공격을 막거나 상대를 밀어내는 것 말고도, 힘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태오가 다음 바위도 뚫어 볼까 하자 라니가 됐다며 앞발을 들고 가로막았다. 루비는 웃다가도 자꾸 땅굴 안쪽을 돌아봤다. 방금 본 번개의 크기와, 그 빛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태오의 등이 오래 눈에 남았다.

태오: 잘 봐. 한 번에 뚫는다!

루비: 우와… 길이 생겼어!

5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그사이 병실에서는 포리의 귀가 조금 움직였다. 남정은 물을 짜던 손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포리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과 남정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다급하게 앞발을 짚었다. 옆구리에서 통증이 올라오자 곧 몸이 기울었다.

남정포리야, 천천히. 아직 일어나지 마.

담요 끝을 붙잡은 남정의 손 덕분에 포리는 넘어지지 않았다. 숨을 고르자 끊어졌던 기억이 돌아왔다. 굴러오던 돌, 모아의 물줄기, 자신이 뻗었던 풀. 그리고 먼지 속에 쓰러진 작은 곰의 모습이 유난히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포리두리도… 여기 있어?

남정이 바로 옆의 담요를 가리켰다. 두리는 눈을 감은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목의 돌 목걸이가 숨결에 맞춰 조금씩 들렸다 내려갔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포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한 만큼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그때는 모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제 눈앞에 누운 두리를 보니, 자기 공격에 저 작은 몸이 바닥을 구르던 순간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남정: 포리야, 천천히. 아직 일어나지 마.

포리: 두리도… 여기 있어?

6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포리는 몸을 낮춘 채 두리의 담요까지 천천히 기어갔다. 남정이 막으려다 멈춘 것은 포리가 공격할 때와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리는 두리의 앞발에 감긴 붕대를 한동안 바라보다, 흙이 묻은 볼의 털을 조심스럽게 핥았다.

포리아까는… 미안해. 많이 아팠지?

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포리는 귀를 늘어뜨리고 다시 한 번 털을 골라 주었다. 붕대 가까이 코를 가져가자 남정이 손가락으로 옆의 깨끗한 털을 짚었다.

남정그쪽은 다쳤어. 옆을 닦아 주자.

남정이 젖은 천으로 굳은 흙을 불리면 포리는 상처를 피해 엉킨 털을 정리했다. 준호가 새 붕대를 찾을 때는 앞발로 바구니를 밀어 주었고, 두리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면 담요가 접히지 않도록 코끝으로 펴 주었다. 자꾸 힘을 주면 옆구리가 아팠지만 포리는 잠깐씩 쉬어 가며 곁을 지켰다.

남정은 왜 공격했느냐고 묻는 대신 물그릇을 포리 가까이 가져다주었다. 포리는 두어 모금 마신 뒤 다시 두리 쪽으로 돌아앉았다. 아직 사과를 들을 수 없더라도, 두리가 눈을 떴을 때 덜 아팠으면 했다.

포리: 아까는… 미안해. 많이 아팠지?

남정: 그쪽은 다쳤어. 옆을 닦아 주자.

7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시루가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두리 바로 옆에 있는 포리였다. 잠이 덜 깬 몸보다 귀가 먼저 곤두섰다. 시루는 으르렁거리려다 목이 아파 짧게 기침했고, 포리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루…두리 곁에서 뭐 하는 거야?

포리상처에 먼지가 남아서. 아플 것 같아.

시루의 앞발 아래에서 차가운 기운이 잠깐 피어올랐다. 그러나 포리는 몸을 숨기지도, 맞설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두리의 볼에 붙어 있던 작은 흙 조각을 떼어 낸 뒤, 남정이 건넨 천을 받아 옆에 내려놓았다. 두리가 불편한 듯 몸을 움찔하자 포리는 곧바로 앞발을 멈추고 숨이 고르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시루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밖에서 보았던 장면은 두리가 쓰러진 순간뿐이었다. 그 뒤에도 포리가 이렇게 곁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세워 두었던 귀가 천천히 내려갔고, 담요를 움켜쥐던 발에서도 힘이 빠졌다.

시루나도… 도울 수 있어?

포리는 잠시 망설이다 두리의 등 쪽으로 흘러내린 담요를 가리켰다. 시루는 다가가 그 끝을 물고 조심히 끌어 올렸다. 둘 사이에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같은 펫을 덮어 줄 담요를 잡고 있었다.

시루: …두리 곁에서 뭐 하는 거야?

포리: 상처에 먼지가 남아서. 아플 것 같아.

8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두리가 눈을 뜬 것은 그 뒤였다. 낯선 천장을 올려다보던 눈이 갑자기 커지더니 몸부터 일으키려 했다. 앞발을 짚자 통증이 올라와 작게 신음했지만 시선은 벌써 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두리아빠는? 아빠도 여기 왔어?

민정은 두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담요를 받쳤다. 두리의 눈이 자신의 뒤를 지나 문으로, 문에서 준호에게로 옮겨 갔다. 누군가 고개만 끄덕여 주면 바로 달려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민정은 그 기대 때문에 대답을 늦췄다가, 더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민정아직 못 찾았어. 이제 우리도 같이 찾자.

두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벌렸다가 닫고, 목걸이의 돌 하나를 앞발로 눌렀다. 결국 눈물이 떨어지자 옆에 앉은 시루가 몸을 조금 붙였다. 포리는 물그릇을 밀어 주고 한 걸음 비켜섰다.

민정은 아버지가 반드시 어디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두리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곳이 어디인지, 찾아다닌 길은 어느 쪽인지 천천히 물었다. 두리의 대답은 울음 때문에 자꾸 끊겼다. 민정은 말을 재촉하지 않고 그 길들을 기억해 두었다. 두리가 다시 문을 바라봤을 때는 아까처럼 혼자 일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두리: 아빠는? 아빠도 여기 왔어?

민정: 아직 못 찾았어. 이제 우리도 같이 찾자.

9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세 마리가 차례로 눈을 뜨자 병실에는 작은 말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민정은 대화에 오래 끼지 못했다. 모아의 담요만은 처음 내려놓았을 때와 거의 같은 모양이었다. 앞발을 쥐어 봐도, 귀 가까이 이름을 불러 봐도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다.

민정모아야, 나야. 눈 좀 떠 봐.

포리가 다가가 모아의 코끝에 자기 코를 가까이 댔다. 숨은 느껴졌다. 다만 평소라면 얼굴을 간질였을 물기가 거의 없었다. 모아의 꼬리도 작은 물결만 간신히 붙잡은 채 담요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포리모아… 내 말 들려?

대답 대신 아주 얕은 숨이 돌아왔다. 포리는 밖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아를 떠올렸다.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 모아가 앞을 가로막았었다. 그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깨어난 시루도 모아 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준호가 새 천을 가져왔지만 민정은 바로 받아 들지 못했다. 몇 번이나 같은 자리를 닦아 주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정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포리가 고개를 들었다. 오래전 수로를 따라 모아와 함께 보았던 가게의 진열장이 떠올랐다.

민정: 모아야, 나야. 눈 좀 떠 봐.

포리: 모아… 내 말 들려?

10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포리는 가게 주인이 작은 병 하나를 햇빛에 비추던 모습을 기억했다. 힘을 너무 많이 써 일어나지 못하는 펫에게 먹이는 물이라고 했었다. 그때 모아는 병 속에서 물결이 움직인다며 진열장 앞을 떠나지 않았고, 포리는 그를 데려오느라 한참을 기다렸다.

포리펫샵에 생명수가 있어. 그걸 먹여야 해.

민정이 즉시 고개를 들었다. 어디 있는 가게인지 묻자 포리는 수로를 따라가다 꺾이는 골목이라고 설명했다. 남정이 벽에 접혀 있던 낡은 지도를 가져왔다. 포리는 앞발로 길을 더듬으며 가게가 있던 모퉁이를 짚었다.

남정그럼 사 오자. 길은 네가 알려 줘.

남정은 빈 가방에서 바닥에 남은 흙을 털고 동전을 모아 넣었다. 가게가 아직 멀쩡한지, 생명수가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민정도 그 점을 물으려다 모아를 돌아봤다. 여기서 계속 이름만 부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포리는 지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아가 자신을 지키느라 얼마나 싸웠는지 아직 다 듣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자기가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남정이 가방 끈을 조이는 동안 포리는 아픈 옆구리에 힘을 덜 주고 일어서는 법을 몇 번 연습했다.

포리: 펫샵에 생명수가 있어. 그걸 먹여야 해.

남정: 그럼 사 오자. 길은 네가 알려 줘.

11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시루는 지도를 접는 남정 앞에 조용히 섰다. 처음에는 길을 비켜 달라는 뜻인 줄 알았던 남정이 한쪽으로 움직였지만, 시루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루나도 갈게. 모아한테 빚진 게 있어.

시루의 시선이 잠든 모아를 향했다. 밖에서는 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포리부터 공격했다. 그 뒤 모아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시루는 입을 다물고, 포리가 표시한 골목을 다시 확인했다.

담요 위에 있던 두리도 몸을 일으켰다. 민정이 앞발을 걱정하자 두리는 몇 걸음 천천히 걸어 보였다.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어서 마지막 걸음에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두리나도 갈게. 아빠도 찾아야 하고.

민정은 두리 앞에 쪼그려 앉아 먼저 생명수를 구한 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흔적을 함께 살피자고 했다. 혼자 멀리 뛰어가지 않는다는 약속도 받았다. 두리는 대답을 망설이다 시루와 포리를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정이 가방의 남은 끈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누나와 자신, 포리만 나설 생각이었다. 문 앞에 선 세 펫을 보니 길에서 지켜봐야 할 얼굴이 늘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 덜 무거워졌다.

시루: 나도 갈게. 모아한테 빚진 게 있어.

두리: 나도 갈게. 아빠도 찾아야 하고.

12번째 장면 · 한글 말풍선

민정은 남정이 멘 가방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동전과 깨끗한 천, 돌아오는 길에 쓸 작은 물통이 들어 있었다. 포리는 실내에서 철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아래에 섰다. 시루는 두리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친 앞발을 제대로 딛는지 지켜보았다. 두리는 그 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씩씩한 척 고개를 들었다.

준호는 모아 곁에 새 물그릇과 천을 놓고 배웅하러 일어났다. 누군가는 남아 숨과 체온을 지켜봐야 했다. 벙커 안쪽에서는 아직 루비와 찌루가 태오에게 들뜬 목소리로 무언가 묻고 있었다. 민정은 계단 중간에서 모아의 침상 쪽을 돌아봤다. 준호가 자신이 남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가방에서 손을 놓았다.

민정모아 부탁해. 꼭 가져올게.

준호기다리고 있을게. 다 같이 돌아와.

남정이 실내 계단 위쪽의 빗장을 빼고 철문을 조금 열었다. 문 너머에도 지상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남아 있었다.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서진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 포리가 먼저 냄새를 맡고 길을 확인했고, 시루는 두리가 뒤처지지 않는지 돌아보았다. 민정과 남정은 세 펫의 걸음에 맞춰 문을 지나 바깥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준호는 계단 아래에서 손을 흔들었다. 문을 닫은 뒤에는 곧장 모아에게 돌아왔다. 모아의 앞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는 젖은 천을 새것으로 갈아 주며, 친구들이 지금 어느 모퉁이를 돌고 있을지 생각했다.

문밖에서 민정이 한 번 돌아봤다. 남정은 어깨의 가방을 고쳐 멨고, 포리는 수로로 이어지는 골목 앞에서 기다렸다. 민정이 모아의 이름을 작게 부른 뒤, 다섯은 그 길로 들어섰다.

민정: 모아 부탁해. 꼭 가져올게.

준호: 기다리고 있을게. 다 같이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