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 종이 울릴 무렵, 햇살 들판에는 갓 구운 빵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열린 창문마다 아이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두르간은 마을 입구에 엎드려 그 익숙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제 곧 두리도 배가 고프다며 달려올 시간이었다.
문득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발소리도, 낯선 냄새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바로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르간은 턱을 들고 천천히 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비어 있던 길 위에 검은 형체가 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겹겹의 연기가 옷자락처럼 뒤틀렸고, 그 가운데 가느다란 보랏빛 틈이 열려 있었다. 두르간이 쳐다보자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르간누구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두르간은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묵직한 앞발이 돌길을 짚었지만 등골을 훑고 내려간 서늘함은 가시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먼저 으르렁거렸을 텐데, 입을 벌려도 목 안이 바싹 말랐다.
검은 형체가 조금 기울었다. 그 아래의 연기가 돌 틈을 따라 마을 안으로 흘러들었다. 두르간은 자신도 모르게 뒷발을 물렸다가 멈췄다. 등 뒤의 집에서 누군가 웃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입구에 무엇이 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두르간: 누구냐…?

두르간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집을 한 번 돌아봤다. 창가에 걸린 작은 옷,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빈 의자, 두리가 늘 뛰어넘던 낮은 담장. 다시 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연기는 이미 앞발 가까이 와 있었다.
그는 물러섰던 발을 앞으로 밀어 넣고 자세를 낮췄다. 어깨의 바위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등에서 시작된 금빛이 돌 갑옷의 틈을 타고 양쪽 앞발까지 번졌다. 손톱만 한 자갈들이 발밑에서 떨리다가 떠올랐다.
두르간이 마을엔 못 들어온다!
두르간이 온몸의 무게를 실어 두 앞발을 내리쳤다. 발밑의 돌길이 움푹 꺼지며 금빛 균열이 어둠 쪽으로 내달렸다. 첫 번째 바위 능선이 길을 찢고 솟구치자, 그 뒤에서 더 큰 능선이 터져 나와 앞의 바위를 밀어 올렸다. 일곱 줄기의 땅이 차례로 뒤집히며 거대한 산맥처럼 상대를 향해 몰려갔다.
굉음에 창문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종탑보다 높이 치솟은 바위 끝이 노을을 가렸고, 뒤늦게 밀려온 먼지가 두르간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앞발이 저릴 만큼 힘을 쏟아 낸 궁극기였다. 저것을 여기서 멈춰야 했다.
마지막 바위가 거대한 벽처럼 기울어 어둠을 덮쳤다. 그제야 두르간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만한 것이 눈앞으로 쏟아지는데도, 보랏빛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두르간: 이 마을엔 못 들어온다!

바위가 어둠에 닿기 직전, 검은 연기가 부풀어 올랐다. 노을이 먼저 가려지고, 지붕과 종탑이 차례로 흐려졌다. 두르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이 일으킨 바위의 금빛 틈을 찾았다. 그것만이 아직 상대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 빛이 갑자기 아래로 꺾였다. 발밑에 맺힌 작은 검은 구체를 향해 돌가루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구체가 커질수록 돌바닥이 들썩였고, 거대한 바위 능선마저 끝부터 부러져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둠이 만들어 낸 블랙홀이었다.
두르간은 몸을 낮추고 앞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발톱 아래에서 땅이 잡히지 않았다. 묵직한 돌 갑옷이 뒤로 끌리더니 뒷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두르간뭐… 뭐지!? 몸이 왜 빨려 들어가는 거야?
가까스로 붙잡은 돌바닥에 긴 발톱 자국이 남았다. 두르간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이번에는 붙잡고 있던 땅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등 위의 바위가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몸통이 그 뒤를 따라 기울었다.
마지막까지 길을 향해 뻗었던 앞발이 검은 중심에 잠겼다. 무언가 외치려던 목소리도 함께 끊겼다. 잠시 뒤 연기가 옅어졌을 때, 그 자리에는 깊게 패인 길만 남아 있었다.
어둠은 텅 빈 입구를 지나 마을 안으로 흘러들었다.
두르간: 뭐… 뭐지!? 몸이 왜 빨려 들어가는 거야?

루비는 담장 아래에서 꼬리를 말고 있다가 땅을 타고 전해진 진동에 눈을 떴다. 마을 입구 쪽에서 굉음이 들렸지만, 지붕 너머로 보이던 금빛은 금세 사라졌다. 곧이어 골목 끝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루비뭐야, 저건...!
낮게 깔린 연기인 줄 알았던 것이 담장을 타고 솟구쳤다. 루비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벽돌이 튀어 올랐다. 옆으로 뛰어 피하려던 몸이 충격에 밀려 돌바닥을 굴렀다.
루비윽!
일어서려 하자 앞발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루비는 다친 발을 가슴 쪽으로 접은 채 담장에 등을 붙였다. 크게 부풀려 보려던 꼬리의 불꽃도 금방 작아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검은 먼지가 목 안으로 들어왔다.
연기는 골목을 지나쳐 가다가 다시 루비 쪽으로 고개를 돌리듯 휘었다. 루비는 남은 발로 바닥을 밀어 몸을 숨겼다.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이빨만큼은 끝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루비: 뭐야, 저건...!
루비: 윽!

수로 아래로 내려간 연기는 물 위에서도 흩어지지 않았다. 징검돌에 올라서 있던 모아는 검은 기운이 물길을 거슬러 오는 것을 보고 두 앞발을 뻗었다. 익숙한 물줄기가 몸을 감싸듯 솟아올라 연기 앞을 막아섰다.
모아내 물길에서 나가!
처음에는 막아 낸 것 같았다. 모아가 안도의 숨을 쉬려는 순간, 물막 한가운데가 깊게 눌렸다. 검은 연기는 부딪혀 튕겨 나오는 대신 물을 밀어붙이며 점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모아는 수로에서 물을 더 끌어 올렸다. 떨리는 앞발을 버티고 서 있었지만 물막은 자꾸만 얇아졌고, 얼굴 가까이까지 휘어 들어왔다.
모아물이 못 버티고 있어!
물이 터지며 모아를 뒤로 밀쳤다. 젖은 돌바닥을 미끄러진 몸이 수로 턱에 부딪쳤고, 머리 위에서 떨어진 널빤지가 출구를 가로막았다. 모아는 얼른 몸을 낮춰 틈새로 기어들었다.
앞발 사이에 모인 것은 이제 작은 물방울 몇 개뿐이었다. 모아는 그것으로 코와 입을 감싼 채, 널빤지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모아: 내 물길에서 나가!
모아: 물이 못 버티고 있어!

정원에서는 포리가 막 새싹 주위의 흙을 다지고 있었다. 울타리가 삐걱거려 고개를 들었을 때, 틈 사이로 검은 연기가 밀려왔다. 포리가 뒤로 물러나는 동안 연기는 밭을 훑었고, 어린 싹들이 흙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포리안 돼, 내 새싹!
포리는 가장 가까운 싹을 흙째 끌어안았다. 그 작은 것을 품에 넣느라 몸을 낮춘 순간, 바로 뒤의 울타리가 부러져 넘어왔다. 포리는 옆으로 구르며 새싹을 배 아래로 감쌌다.
포리오지 마!
겨우 고개를 들었지만 정원으로 돌아갈 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귀 끝에 묻은 흙을 털 틈도 없이, 포리는 새싹을 다시 끌어안고 골목으로 뛰었다. 조금만 속도를 늦춰도 등 뒤의 검은 기운이 따라붙을 것 같았다.
익숙한 물 냄새가 나는 모퉁이에 닿아서야 포리는 잠깐 멈췄다. 숨이 가빠 귀가 축 늘어졌지만, 품 안의 새싹은 놓치지 않았다.
포리: 안 돼, 내 새싹!
포리: 오지 마!

준호는 집으로 달려가던 중 담장 아래에서 움직이는 주황빛을 보았다. 처음에는 떨어진 불씨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빛이 움찔 물러나더니, 먼지 묻은 얼굴 하나가 벽돌 틈으로 드러났다.
작은 여우였다. 한쪽 앞발을 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준호가 다가가자, 여우는 몸을 더 낮추고 이빨을 드러냈다. 준호도 놀라 발을 멈췄다. 다친 동물을 만져 본 적도 없는데 손부터 뻗을 뻔했다.
준호가까이 가도 될까?
루비거기서 멈춰.
단호한 목소리와 달리 여우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빈손을 보여 주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여우는 손끝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준호알았어. 더 안 갈게. 다친 발은 바닥에 안 닿게 해 줄 수 있어.
준호는 재킷을 벗어 둘 사이에 펼치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 루비는 낯선 냄새를 맡으며 재킷과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선뜻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친 발로 혼자 남아 있을 수도 없었다.
골목 끝에서 검은 연기가 다시 밀려오자, 루비가 마침내 재킷 위로 한 발을 옮겼다. 준호는 바로 잡아 올리지 않고 루비가 몸을 기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친 앞발을 누르지 않도록 천천히 감싸 안았다.
품에 안긴 뒤에도 루비의 귀는 바짝 서 있었다. 준호 역시 팔에 힘을 너무 주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내려다보았다. 둘 다 긴장한 채였지만, 골목을 빠져나갈 때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준호: 가까이 가도 될까?
루비: 거기서 멈춰.

집에 도착한 준호는 문을 잠그고 식탁 위에 수건을 펼쳤다. 루비를 내려놓은 뒤 구급상자를 가져왔지만, 막상 다친 발 앞에서는 손이 망설여졌다. 루비가 코끝으로 수건을 밀어 발을 내밀어 주고 나서야 준호는 붕대를 풀었다.
준호이름이 뭐야? 난 준호야.
루비루비. 그런데… 붕대 처음 감아 봐?
준호그렇게 티 나?
루비응. 내 발이 빵처럼 됐어.
준호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정말 수건까지 함께 둘둘 감겨 있었다. 너무 꽉 조이지 않았는지 살펴보다가 둘의 눈이 마주쳤고, 준호의 입가에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창문이 안쪽으로 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밖에서는 아무것도 누르고 있지 않은데 유리 한가운데로 검은 얼룩이 번졌다. 루비의 귀가 먼저 곤두섰다.
준호여긴 안전할 줄 알았는데...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 뒤로 비상종이 세 번 울렸다. 준호는 지하로 대피하라는 신호를 알아듣고 식탁을 밀었다. 바닥 덮개 아래에는 여러 집을 잇는 공동 벙커의 계단이 있었다.
루비아래로! 빨리!
준호는 구급상자와 루비를 품에 안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위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쏟아졌다. 그는 돌아보는 대신 루비의 얼굴을 재킷으로 가려 주고, 발밑의 다음 계단을 찾았다.
준호: 여긴 안전할 줄 알았는데...
루비: 아래로! 빨리!

그 무렵 민정은 동생 남정을 데리고 벙커로 향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기 전 남정이 따라오는지 확인하려는데, 수로 아래에서 다급하게 물을 치는 소리가 났다. 민정이 난간 너머로 몸을 숙이자 널빤지 사이에서 파란 얼굴이 튀어나왔다.
민정은 떨어질까 봐 반사적으로 두 팔을 벌렸다. 모아는 그 동작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뒷발을 굴렀다.
모아나도 데려가! 꼭 붙어 있을게!
축축한 몸이 품에 뛰어들었다. 민정이 한 발 뒤로 밀릴 만큼 힘껏 안긴 모아는 앞발을 어깨에 걸고 놓지 않았다. 물이 소매 안으로 흘러들자 민정의 어깨가 움찔했다.
민정잠깐, 옷 다 젖잖아!
모아는 대답 대신 더 바짝 붙었다. 민정은 한숨을 쉬다가, 어깨를 붙든 작은 앞발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몸 아래를 받쳐 주자 모아의 숨도 조금 가라앉았다.
민정알았어, 안 내려놓을게. 그런데 이름은 알려 줘야지.
모아모아! 벙커 가는 거지? 이쪽 길로 가면 돼!
작은 수달이 물기 묻은 앞발로 골목을 가리켰다. 민정은 모아를 고쳐 안고 남정을 불렀다. 품 안에서는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옷이 젖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아: 나도 데려가! 꼭 붙어 있을게!
민정: 잠깐, 옷 다 젖잖아!

남정은 누나를 따라가려다 울타리 곁에서 멈췄다. 토끼 한 마리가 흙 묻은 새싹을 품고 웅크려 있었다. 잎사귀 같은 귀는 아래로 늘어졌고, 작은 배가 숨을 쉴 때마다 빠르게 오르내렸다.
남정이 손을 내밀자 포리는 곧장 한 발 물러났다. 남정은 더 다가가지 않았다. 토끼가 도망치려다 다시 연기 쪽으로 뛰어들까 봐, 내민 손도 천천히 거두었다.
그때 골목 앞에서 모아가 민정의 어깨 너머로 앞발을 흔들었다. 포리의 귀가 조금 들렸다. 낯선 아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파란 얼굴이었다.
포리모아까지 가면... 나 혼자잖아.
포리는 모아가 멀어지는 쪽을 보다가 남정을 올려다봤다. 남정은 품에 안으려던 자세를 풀고 옆으로 비켜 섰다. 같이 갈 자리를 내어 주는 뜻이었다.
남정그럼 너도 같이 가자. 내가 돌봐줄게.
포리는 잠깐 더 망설이다가 남정의 신발 옆으로 다가왔다. 안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정이 걸음을 떼자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따라붙었다.
남정새싹도 데려가면 되지?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고.
포리가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남정은 앞서 달리던 누나에게 기다려 달라고 외친 뒤 보폭을 줄였다. 포리도 이제 모아만 바라보지 않고, 바로 옆에서 움직이는 남정의 발을 가끔 확인했다.
포리: 모아까지 가면... 나 혼자잖아.
남정: 그럼 너도 같이 가자. 내가 돌봐줄게.

계단 끝 철문을 닫고 빗장을 건 뒤에야 준호는 루비를 내려놓았다. 팔이 저릴 만큼 꼭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루비가 재킷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준호는 다친 발부터 살폈다.
맞은편 통로에서 발소리가 났다. 젖은 수달을 안은 여자아이가 먼저 들어왔고, 조금 뒤에는 토끼와 나란히 걷는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여자아이는 동생을 보자 안도한 얼굴로 다가갔다.
민정왜 이렇게 늦었어! 놓친 줄 알았잖아.
남정얘가 잘 못 뛰어서. 새싹도 떨어뜨릴까 봐.
포리가 새싹을 가슴에 더 바짝 붙였다. 민정은 뭐라고 하려다 말을 삼키고 남정의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그제야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준호난 준호야. 얘는 루비.
민정민정이야. 쟨 내 동생 남정.
민정이 모아를 내려놓자 루비가 조심스럽게 코를 내밀었다. 다친 친구를 확인하려던 모아는 뜨거운 숨결에 놀라 물을 조금 튀겼다. 루비의 코끝에서 작게 김이 올랐다.
루비인사하려던 건데 왜 물부터 뿌려?
모아네 코가 뜨거워서 놀랐잖아!
둘이 서로의 코와 앞발을 살피는 사이, 포리는 담요 귀퉁이를 입에 넣고 있었다. 남정이 조용히 담요를 빼내며 먹을 건 따로 찾아보겠다고 하자, 준호에게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을 상황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터진 웃음을 바로 거두기는 어려웠다. 굳어 있던 민정의 어깨도 조금 내려갔다. 지상에서는 여전히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적어도 지금 이 방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준호: 난 준호야. 얘는 루비.
민정: 민정이야. 쟨 내 동생 남정.

철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웃음 사이로 끼어들었다. 모두 말소리를 낮춘 순간, 계단 위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내려 왔다.
문밖의 목소리루비, 나야. 여기로 나와.
루비의 귀가 곧게 섰다. 준호였다. 다친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루비는 반사적으로 문 쪽에 한 발을 내디뎠다가, 바로 뒤에서 소매 스치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렸다. 준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입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루비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이번에는 민정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문밖의 목소리모아, 이리 와. 밖은 괜찮아.
모아가 반갑다는 듯 몸을 들썩였다. 민정은 급히 모아의 몸을 받쳐 안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어깨를 꼭 붙들고 있던 앞발이 문 쪽으로 뻗었다. 민정을 올려다본 모아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품에서는 분명 같은 냄새가 나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저 위에서 들리고 있었다.
문밖의 목소리포리, 새싹 가져왔어. 문 열어 줄래?
남정은 숨을 삼켰다. 자기 목소리였다. 포리는 품 안의 새싹을 내려다보다가 긴 귀를 문 쪽으로 돌렸다. 조금 전 함께 가자고 했던 아이가 왜 밖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남정이 손을 내밀자 포리는 그 손과 계단을 번갈아 보았다.
준호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밖에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니었다. 펫들이 조금씩 마음을 연 목소리만 골라서, 그들을 문밖으로 불러내고 있었다. 어둠은 자신들이 나눈 말을 듣고 있었다.
준호는 루비의 앞을 막듯 무릎을 꿇었다. 붙잡아 놀라게 하는 대신, 눈높이를 맞추고 빈손을 천천히 보여 주었다.
준호루비, 나 여기 있어.
루비가 준호를 보았다. 하지만 문밖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귀가 다시 뒤로 돌아갔다. 민정은 모아를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고, 남정은 포리가 새싹을 놓치지 않도록 품 안으로 받쳐 들었다. 세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말없이 펫들 곁으로 바짝 모였다.
철문 아래로 검은 연기 한 줄이 스며들었다. 그 위에서 세 아이의 목소리가 차례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루비, 모아, 포리. 안에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둠은 문을 부수려 하지 않았다. 안에서 누군가 스스로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흉내 낸 준호의 목소리: 루비, 나야. 여기로 나와.
어둠이 흉내 낸 민정의 목소리: 모아, 이리 와. 밖은 괜찮아.
어둠이 흉내 낸 남정의 목소리: 포리, 새싹 가져왔어. 문 열어 줄래?
준호: 루비, 나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