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 꺼져 가는 불

그날 저녁까지 햇살 들판은 평범했다. 빵집에서는 김이 났고, 골목에서는 저녁 먹으라는 소리가 났다.
쾅!
검은 덩어리가 종탑 위로 떨어졌다. 가로등이 골목 끝부터 차례로 꺼졌다. 어둠이었다.
담장 아래 있던 루비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바람이 벽돌을 뜯어냈다.
루비뭐야, 저건...!
피할 틈이 없었다. 루비가 바닥에 구르며 앞발을 접었다. 꼬리 끝 불이 손톱만 해졌다.
루비윽!
작은 여우는 울음 대신 이를 드러냈다. 다가오는 연기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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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뭐야, 저건...!
루비: 윽!
모아, 무너지는 물막

수로에서도 검은 연기가 쏟아졌다. 모아가 두 앞발로 물을 끌어 올렸다.
모아내 물길에서 나가!
얇은 물막이 연기를 막았다. 딱 한 번.
쩌적!
물이 산산이 튀었다. 모아는 돌바닥을 미끄러졌고, 무너진 널빤지가 출구를 막았다.
모아물이... 안 버텨!
모아는 더 작은 물방울을 모았다. 이번엔 자기 몸 하나라도 감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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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내 물길에서 나가!
모아: 물이... 안 버텨!
포리, 놓지 못한 새싹

정원의 울타리가 안쪽으로 꺾였다. 포리가 흙 묻은 앞발을 멈췄다.
검은 바람이 밭을 훑었다. 어린 싹들이 뿌리째 뽑혔다.
포리안 돼, 내 새싹!
포리는 마지막 새싹을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바로 뒤에서 울타리가 부러졌다.
포리오지 마!
숨을 곳은 없었다. 포리는 잎사귀 같은 귀를 바짝 눕히고 골목 쪽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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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리: 안 돼, 내 새싹!
포리: 오지 마!
다가가도 될까

준호는 집으로 달리다 멈췄다. 무너진 담장 아래, 주황빛 눈 두 개가 움직였다.
다친 여우였다. 준호가 한 발 다가가자 작은 이빨이 먼저 보였다.
준호가까이 가도 될까?
루비거기서 멈춰.
준호도 멈췄다. 말하는 여우라니. 놀라 굳은 손을 천천히 펼쳤다.
준호알았어. 여기 있을게.
벗은 재킷을 바닥에 놓고 한 뼘 뒤로 물러났다. 루비는 손과 재킷을 번갈아 봤다.
검은 연기가 다시 골목을 돌았다. 루비가 다친 발을 끌며 재킷 위로 올라섰다. 준호는 눈을 맞춘 채 천천히 감싸 안았다.
둘 다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같은 쪽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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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 가까이 가도 될까?
루비: 거기서 멈춰.
집도 안전하지 않았다

준호는 문을 잠그고 루비를 식탁 위에 눕혔다. 물 한 그릇, 수건, 구급상자. 손이 떨려 붕대를 세 번 놓쳤다.
준호이름은?
루비루비. 넌 붕대 처음 감아?
준호티 나?
루비내 발이 빵처럼 됐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때 검은 연기가 창문을 눌렀다.
쩌적.
준호여긴 안전할 줄 알았는데...
비상종이 세 번 울렸다. 지하 대피 신호였다. 준호가 식탁 아래 덮개를 열었다. 여러 집과 이어진 공동 벙커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루비아래로! 빨리!
준호가 루비를 안고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등 뒤에서 유리가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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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 여긴 안전할 줄 알았는데...
루비: 아래로! 빨리!
모아는 먼저 안겼다

같은 시각, 민정은 남정에게 앞 골목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수로 쪽에서 첨벙, 소리가 났다.
널빤지 틈으로 파란 얼굴이 불쑥 나왔다. 민정이 놀라 손을 내미는 순간—
모아나도 데려가! 꼭 붙어 있을게!
찰박!
모아가 먼저 품으로 뛰어들었다. 축축한 앞발이 민정의 어깨에 착 감겼다.
민정잠깐, 옷 다 젖잖아!
모아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민정은 젖은 소매를 보고, 자기를 꼭 붙든 앞발을 봤다.
민정...이름은 알려 줘야지.
모아모아! 벙커 가는 거지? 나 길 알아!
민정은 모아를 고쳐 안고 뛰었다. 작은 수달이 가리키는 골목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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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나도 데려가! 꼭 붙어 있을게!
민정: 잠깐, 옷 다 젖잖아!
포리는 뒤늦게 따라왔다

몇 걸음 뒤에서 남정이 멈췄다. 울타리 옆 토끼 한 마리가 새싹을 품고 있었다.
남정이 손을 내밀자 포리는 한 발 물러났다. 남정도 따라가지 않았다.
골목 끝에서 모아가 민정의 어깨 너머로 앞발을 흔들었다.
포리모아까지 가면... 나 혼자잖아.
포리는 떠나는 모아와 기다리는 남정을 번갈아 봤다. 귀가 축 처졌다.
남정그럼 같이 가. 천천히.
한 발. 또 한 발. 포리가 마지못해 남정의 신발 옆에 섰다. 안기지는 않았다.
남정새싹도 데려가면 되지?
포리가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남정은 뛰는 대신 토끼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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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리: 모아까지 가면... 나 혼자잖아.
남정: 그럼 같이 가. 천천히.
벙커에서 만난 여섯

철문이 닫히고 나서야 준호는 숨을 내쉬었다. 맞은편 통로에서 민정이 들어왔다. 조금 뒤 남정과 포리도 도착했다.
민정왜 이렇게 늦었어!
남정얘가 천천히 온대.
포리가 새싹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민정은 뭐라 하려다 동생의 머리를 한 번 헝클었다.
준호난 준호야. 얘는 루비.
민정민정이야. 쟨 내 동생 남정.
루비가 모아에게 코를 내밀었다. 놀란 모아가 물을 튀겼다. 칙, 코끝에서 김이 났다.
루비인사했는데 왜 씻겨?!
모아왜 이렇게 뜨거워?!
포리는 둘 사이에서 담요 끝을 우물우물 씹었다. 남정이 조용히 담요를 빼냈다.
남정그건 저녁밥 아니야.
처음으로 웃음이 났다. 지상에서는 마을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 작은 방에는 여섯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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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 난 준호야. 얘는 루비.
민정: 민정이야. 쟨 내 동생 남정.
문밖의 목소리

쿵. 쿵. 쿵.
웃음이 멎었다. 모두 철문을 봤다.
문밖의 목소리남정아. 누나야. 문 열어.
남정의 손이 굳었다. 누나는 바로 옆에 있었다.
문밖의 목소리여긴 안전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준호의 목소리였다. 조금 전 집에서 했던 말과 숨소리까지 같았다.
민정밖에서... 우리 목소리가 나.
준호아무도 대답하지 마.
철문 아래로 검은 연기가 한 줄 스며들었다. 모아가 물을 모으고, 포리가 새싹을 내려놓았다.
준호의 품에서 루비가 다친 발을 딛고 일어섰다. 꼬리 끝에 작은 불이 붙었다.
어둠은, 벌써 그들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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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 아무도 대답하지 마.
민정: 밖에서... 우리 목소리가 나.